어초문답 (漁樵問答) - 민병직(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 우리가 참이나 건조하고 메마르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유동하는 물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상들이 작동해서일까,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빗줄기처럼 액체적인 감각이 전하는 유연한 느낌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한 비루한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식의 상상들이 펼쳐지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그림 속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언뜻 우리 내 일상과 겹쳐져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푸석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내 삶의 방식과는 한참이나 다른 여유와 한적함, 그리고 유동하는 자유로움마저 묻어 있어 그 자체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느낌이다. 살짝 웃음마저 베어 나오기조차 한다. 하지만 그저 시원한 웃음만이 아닌 작금의 현실을 둘러싼 것들과도 긴장감 있게 맞닿아 있으니 격조차 느껴지는 해학이라 해야 할 것만 같다.

이쯤이면 작가가 작품의 화제(畵題)로 빌려온 ‘어초문답(漁樵問答)’은 꽤나 유용한 그림의 맥락(後景)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말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한낱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어초문답은 옛 선인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말이다. 혼탁하고 찌든 현실을 벗어나 산과 강호를 벗 삼아 자연의 이치와 아름다움을 논하는 풍경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속을 멀리하여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한거하는 지자(智者)와 인자(仁者)의 격이 있는 삶을 빗댄 것이고, 그러한 삶 속에서 오고가는 대화 또한 ‘청담(淸談)’이라 하여 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라 할 수 있는 노장(老壯)의 사상을 구하는 대화 취미를 말한다. 그저 평범한 소통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따져들고 이를 구하려 하는 것이니, 일찍이 서양의 소크라테스가 말한 산파술(maieutke)에 버금가는 철학적 담론인 셈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문답법도 사실 일상의 사소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했던 것처럼 작가 역시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일정한 깨달음의 단상들을 펼쳐간다. 시대를 달리한 신어초문답인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이전의 그림들에 비해 삶에 대한 오밀조밀한 깨달음들을 드러내는 방식이 남다르고 더욱더 압축된 형상으로 전하는 지라, 마치 그림과 마주하여 세상과의 이런저런 대화들을 읊조리고 이를 차분히 옮겨내고 있는 것만 같다. 작가 역시 옛 선비들처럼 세상의 찌든 현실을 뒤로한 채, 스스로 어부(漁夫), 어은(漁隱)을 자처하여 세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림을 통해 이를 돌이켜보고 성찰하면서 세상과의 긴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종국에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을 향해 묻고 답하는 긴 여정을 통해, 때로는 그 과정에서 빚어진 작가적 상상력을 그림 속의 다양한 형상들로 투영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복잡하기만 한 단상들을 우회하고, 생략하기를 반복하면서 작가 자신만의 정돈된 사유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의 경우 그림의 과정 혹은 그리기 자체에 상당한 의미의 무게가 실리지 않나 싶다. 물론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저마다 자신만의 그리기 방식이 있어 그림을 통해 비단 무언가를 전하고 드러내는 것 못지않게 그리기 자체가 마음을 가다듬고, 감각을 유희하는 삶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작가 역시 그렇게 그리기의 과정 자체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특유의 화풍으로 인해, 옛 동양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들을 해온 작가이지만 그리기 행위를 생각과 몸의 실천으로 일치시키려 한다는 면에서 동양사상의 일정한 덕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만의 그림 그리기를 통해 풀리지 않은 고민을 풀어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유와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을 통해 사유의 다름과 그 즐거움을 공감케 하니 말이다. 작가의 ‘문답’은 결국 그림을 통해, 혹은 그림과 함께 세상에 말을 거는 작가만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느리고 여유 있는 대화의 방식이 여느 일상의 대화법과는 거리가 있어 흔쾌히 이에 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녹색 톤의 차분한 그림의 자태들도 그렇지만 종종 등장하는 엉뚱하기조차 한 작가의 상상도 이러한 즐거운 문답에 한몫 거드니 말이다.

전작들도 그러하지만 작가 그림들의 많은 부분들은 물고기들과 그들이 노니는 물의 이미지들과 연관되어 있다. 종종 화면 속 물고기들이 사람의 형상과 한 몸을 이루기도 하고, 물 밑 세상들도 현실의 풍경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겹쳐진다. 물이 갖는 유영(遊泳)의 이미지들로 숨 막히고 단단한 현실의 세상들을 물 흐르듯 비껴가고, 넘어서려 한 느낌들이다. ‘어락도(魚樂圖), ‘어락원(魚樂園)’과 같은 이전 전시의 제목들도 이와 연관되는 것 같은데, 여유로움과 편안한 휴식이 자리하는 이상적인 상황이나 공간에 대한 지향들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종종 작가 자신의 분신인 것 같은 ‘물고기-인간(魚人, 伴人半漁)’이 그 호젓한 공간 속을 자유롭게 누비기도 하니 작가의 세상에 대한 편치 않은 심경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부드럽게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호젓한 자연의 산하에 살고자 했던 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의 세상에 대한 비판은 직접적이지 않아도 충분했을 터이다. 때로는 암시적인 노래 자락이나 적극적인 삶의 자유로움에 대한 희구만으로도 옹졸한 현실의 세태를 얼마든지 넘어 설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심경들은 조금씩 구체적인 현실 공간으로 확장하여 일상적 공간들마저도 점하게 되는데, 한옥은 물론 일반 주택이나 빌딩 속의 공간들이 강호(江湖)의 이미지들로 침투되기도 하고 속세의 유람선들은 물론 대형 크루즈 선박에까지 동양의 산수풍경이 입혀지기도 한다. 작가의 유쾌한 상상이 현실 공간으로 나래를 트는 것인데, 결코 과하거나 무거운 느낌들은 아니다. 그림이 갖는 조곤조곤한 형상의 즐거움까지 덜어내려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작품의 제목들도 이런 느낌들을 전하려는 것만 같은데, ‘순간의 여유’, ‘별일 없이 산다’, ‘배를 저어간다’, ‘인생은 아름다워’, ‘희망의 나라로’, ‘여행의 기억’, ‘산수유람’ 등, 여유 있고 유유자적한 삶에 대한 지향들을 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배나 여행의 모티브는 작가의 그림에서 중요한 의미론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만 같다. 아마도 내심 속세를 벗어나 강호산하에 은거하여, 세상사의 한적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려 했던 작가의 솔직한 심경의 발로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이미 그 자체로도 여행과도 같은 삶일 터, 작가는 여행하듯 이리저리 세상을 유영하고 싶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그림을 통해 느긋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전작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이러한 호젓하고 한가한 삶을 향한, 말하기의 방식이나 태도에 있어 조금은 달라진 느낌이다. 좀 더 적극적인 작가의 행위와 몸짓들이 더해지되, 더 단아해지고 그만큼 더 긴 호흡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깨달음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 한 결 더 여유롭고 때로는 초탈한 태도들마저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낚는지 세상을 낚는지 이에 개의치 않고 구멍 뚫린 그물로도 세상을 과히 다 담아낼 호방한 기세가, 웃음에 앞서 어떤 여유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자유로움을 투사했던 물고기-인간도 이제 다시 그 터전인 물 속 세상을 향해 놓아주려 하는 것만 같기도 한데, 여전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다시 물고기 본연의 이미지들로 되돌아가는 과정들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 변신의 움직임들이 자유롭기만 하다. 작가의 이러한 세상에 대한 한결 여유로워진 단상들은 작은 크기의 먹 드로잉들을 통해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해진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그러한 사유의 단상들을 응축해서 펼치기엔 때로는 작은 드로잉들이 더 제격일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은 더 단단해진 느낌이지만 그림 안에서 펼쳐놓은 사유의 형상들이 가진 운신의 폭은 더 커진 것 같은데, 이미지 상의 과장이라기보다는 사유의 폭 자체가 그만큼 여유로워졌기 때문인 듯싶다. 생각은 때로는 그렇게 크거나 작게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세상이 가진 오만가지 속내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리라. 작가 역시 그림 속에서 작가가 드리운 그물의 깊이와 폭처럼 한결 호방해진 태도로 세상을 낚시질 한다. 실제로 무언가를 낚는 것이 중요치 않음은 낚시꾼들의 호언만은 아니었는지, 작가의 그림 속엔 낚시에는 관심조차 없는 조사(釣師)가 등장하거나 아애 빈 그물로 호수의 깊은 물을 긷는 풍경마저 등장한다. 아이러니이기보다는 호방한 삶의 여유마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작은 드로잉에는 터진 그물로 달아나는 물고기 그림이 있는가 하면 움켜진 손을 무색케 하는 터진 그물의 선명한 이미지나 어인(魚人)에서 물고기로(혹은 그 반대일지도) 자유롭게 변신하면서 유영하는 이미지들도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그림은 머릿속 가득한 상념들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가면서, 마치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이미지들이다. 스스로 그러하게끔(自然) 내버려 두려 했던 것일까. 숲이 호수가 되고, 다시 나무가 되도 개의치 않을 태세이다. 모두다 그저 저 너른 자연 속의 작은 변화일 테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작가의 실제 현실로 겹쳐지기도 한다. 그리다 만 실패한 드로잉들조차 구겨진 채로 낚시 망에 담겨진 채로 전시되는가 하면, 종종 화면 속에서 남겨진 자국들조차 개의치 않는 여유로움이 이러한 점들을 보여주는 태도들일 것이다. 어떤 완성된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과정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림이라고 예외일까. 그리기 위해 고심해야 했던 그 숱한 상념들 또한 소중하기만 한 작가의 삶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세상과의 밑도 끝도 없는 고민들을 그때그때마다 고군분투하면서 해결해야할 것들이라기보다는 그 과정마저도 즐기면서 천천히 해소해야 한다는 삶의 미덕마저 알아차린 듯하다. 아니면 더 넓은 자연사의 일들로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임을 못내 깨닫기조차 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작들에서도 볼 수 있었던 산수 이미지로 침투된 주거 공간을 그린 그림들도 이번 전시에는 ‘휴가(休家)’라 하여 더 일상적인 느낌을 주는 연립주택의 최적화된 상태로 자연화 되어 있는 느낌이다. 자연으로 되돌아가도록 한 것일까, 아니면 더 현실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옛 동양화 같은 먼 이상향이 아닌, 현실의 좀 더 자연화 된 풍경으로 거듭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더 완숙해지고 자리를 잡은 표현력도 이에 한몫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그림에는 이처럼 동양화가 가진 담백한 사유의 정취에 더해, 지금 시대의 감성이 전하는 형상의 자유로움과 즐거움마저 자리한다. 그림 사이사이 작가가 세상에서 체득한 삶의 기지는 물론 유쾌한 상상력이 빚어내는 유희들이 조곤조곤 녹아있다. 정형화된 이미지의 형상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고 비틀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해야 하는 안정적인 그리기의 힘이 있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작가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변신의 폭과 리듬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형상, 이미지의 강도를 구동시킬 수 있는 표현의 자유로움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견 낯설어 보일 수도 있는 작가의 화풍조차 그렇게 거리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들도 형의 변신을 어느 정도 통어할 수 있는 작가의 화력(畵力)에 더해, 그 변신들이 갖고 있는 의미의 논리가 일정한 화용론을 구사했기 때문인 듯싶다. 답답하고 딱딱한 현실을, 유동하는 액체가 관통하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빗댄 것이나 동양화의 화제를 차용해 작가의 유유자적한 삶의 지향으로 풀어낸 것들이 그런 면모들일 것이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을 가로지르는 횡단이나 비정형적인 공간들의 낯선 형태들, 엉뚱하기조차 한 변신의 양태 자체들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가적 사유와 상상력이 빚어내는 표현의 강도(强度)와 효과일 터이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동양화의 현대적 변용이나 아니냐 하는 논의들도 해묵은 것들일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유롭게, 이 시대 젊은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성이 가진 다양한 힘들을 발산하고, 오래됐지만 여전히 새로움일 수밖에 없는 한층 여유 있는 삶의 어떤 격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것 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