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산책'의 사유공간: 김민주의 2014년《숲을 그린 까닭》 - 정연심(홍익대학교 교수)

I. 게으른 산책(idle strolling)

동양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민주는 그동안《어락도(魚樂圖》(2007),《어락원(魚樂園)》(2009), 《흥얼흥얼(Humming)》(2011), 《어초문답 (漁樵問答(》(2012)으로 이상과 현실의 중첩된 공간을 그려왔다. 매 전시마다 작가가 제시하는 전시 제목들은 시나 소설의 연작처럼 뭔가를 암시하는 '심경'을 반영하는 지시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김민주 작가가 동양화로 구축해온 이상성에는 우리가 꿈꾸는 무릉도원과도 같은 공간이 등장해왔지만, 막연하게 과거 속에 매몰된 이상향이 아니라, 그곳에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공간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 2년 전에 작가가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라는 주제를 통해서, 나무꾼과 어부가 만나서 서로 대화하는 전통적인 주제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그 이후에 일어난 소소한 변화를 아주 느리게 숲을 산책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들추어낸다. 그림 속의 여성은 산책자이자 사색가이다. 여기서 김민주가 생각하는 '게으름'이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사전적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이후 이뤄지는 사색에 잠긴 모든 생각의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내려놓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그리기는 지도그리기처럼 '여정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생활의 리듬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슬로 모션으로 돌아가는 산책과 걷기의 공간이다. 그동안의 작업들과 달리, 신작에 등장하는 작은 모티프들은 생각의 여정을 알려주는 길잡이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사유의 숲>(장지에 먹과 채색, 138x200cm.)에는 조용한 숲 속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였다. 이전의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김민주 식의 공간 구성이나 색채 방식과 연장선상에 있지만 <사유의 숲>은 채색을 최소화하여 여백의 공간을 더욱 많이 만들어낸다. 이것은 생각의 여백, 사색의 여백처럼 문답이후,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생각의 공간이다. 아니, 새로운 대답이나 반응으로 채워야할 할 필요성에서 벗어나 '거리두기'를 일삼는 사유의 공간인 셈이다. 일을 하다가 멈춘 여성은 잠시 노동을 접고 숲에서 드러누워 있다. 그녀의 몸은 일부 자연 속에서 파묻혀 있고, 한 여성은 사다리에서 과일을 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다른 여성은 모자를 푹 쓰고 누워있는 모습이지만, 그 옆에 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을 읽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멀리 보이는 그네와 의자는 아무도 자리하고 있지 않지만, 여유롭게 산책하면서 쉽게 앉아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숲 속의 공간, 생각의 공간이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소풍이나 휴식처럼 보이지만,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조용히 곱씹어볼 수 있는 우리가 순간순간 꿈꾸는 시간이 정지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나태해보이지만 결코 나태하지 않으며, 지루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지루하지 않다. 아니, 권태롭고 지겨울 정도로 느린 공간이지만 생각이 고이는 샘과도 같은 길을 만들어낸다. 느리지만 빠르게 많은 생각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생산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걷기의 여정은 <숲을 그린 까닭>(장지에 먹과 채색, 135.5x196.5cm.)에 등장하는 무성한 나무와 과일로 이뤄진 숲 그림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회화적 공간이다. 모자를 쓴 여성은 '여행용 트렁크'를 가지고 숲 속을 산책하는 여행자로 돌아온다. 샤를 보들레르 식의 산책(flânerie)은 플라뇌르(flâneur/남성산책자)들이 도시 거리를 활보하며 자본주의의 대형 스펙터클을 구경하고 문화를 소비하는 인물들이었다면, 김민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 산책자는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서 숲 속을 거닐며 자연스럽게 빨리 변화하는 세상을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게으르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관조하는 인물인 것이다.

2014년도의 신작에는 이전 작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표현어법이 눈에 띤다. 예를 들면, 2012년에 제작된 <휴가>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빌라건물을 중심으로 한 풍경화가 등장하였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특정 장소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이 빌라가 어떤 형식의 건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어떤 유형의 삶을 반영한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숲을 그린 까닭>과 <사유의 숲>에는 현실적인 나무나 특정 사이트나 장소를 반영하지 않고, 마치 유사한 나무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두 작품에서 나무와 과일과 같은 특정 모티프들을 반복해서 그려나가는 행위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비워내고, 덜어내는 사유의 과정을 이끌어낸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혹은 추상적인 생각은 화면 위에 부유하면서 비워지는 사색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II. 김민주의 사색풍경화(ideascape)

작가는 이번 작업들에 대해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내면의 나무와 사물, 형상들로 표현하여 본인의 심리, 심경을 비유하는 사유 공간"을 그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물(物)의 세계는 보이는 사물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표상하는 사색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색풍경화(ideascape)'는 생각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풍경화로, 물(物)의 모양을 한 생각들은 숲을 이루고, 몸을 이루며, 의자가 되고, 사다리가 된다. 완결된 스토리를 구성하지 않아도 작가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천천히 풍경의 여정을 쫓아가며 상황을 반추하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사색풍경화는 작가의 내면성을 드러내는 마음의 그림이기도 하지만, 관람자들은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으며 마치 숨바꼭질 놀이처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숲 속에 반쯤 드러난 인물은 어디에선가 불쑥 뛰어나올 것 같으며 나무와 책상은 지적인 노동을 상징하듯 자연과 대비를 이루며 표현되었다. <물-길>, <빈 배 가득 밝은 달만>에서는 여정과 산책으로 자연과 한 몸을 이루는 조화로움이 베여있다.



  장지에 먹과 채색을 주로 사용하는 김민주의 동양화는 과거나 전통에 묶여있는 동양화가 아니라 현재와 계속해서 조우하는 매체적 성격을 띤다. 그의 작업에는 과거와 현재만큼이나 동시대 문화와 호흡을 이루고 있다. 동양화는 전통적인 동양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여기지만 김민주의 동양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개념적 기반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작가는 지금, 오늘, 김민주 세대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개념풍경화, 사색풍경화를 표현하여 과거를 단순하게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각을 끊임없이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 먹과 붓을 이용한 수묵 채색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미디엄이 된다. 실시간(24시간 온라인화) 쉬지 않고 생각하고 성실하기를 강요하는 동시대 문화 맥락에서, 김민주의 작업은 무위(無爲)의 순간을 회화적 형태로 풀어내는 과정을 읽어 내릴 수 있다. 작동하는 모든 것을 멈추고 작동하지 않는 순간을 만들어 보는 것,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을 역설적으로 하고 있는 것. 게으름 표상 뒤에 숨겨진 역설적 현상은 김민주가 '숲을 그린 까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