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월간 탑클래스 -이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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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로 불러들인 이상향 – 김민주
“무더운 여름날, 멍하니 학교 연못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졸업작품 전시회 준비로 머리가 복잡하던 때였죠.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시원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학교 연못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요? ‘너도 그 안에 갇혀서 몸부림쳐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물고기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물고기가 나인지 내가 물고기인지 몰랐죠.”
동양화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
인간과 자연은 결국 하나라는 장자의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경험한 김민주 작가는 이때부터 의인화된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연못을 가득 채운 연꽃과 연잎, 연밥 사이를 헤엄치는 그림 속 물고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팔다리가 돋아나 있고, 큼직한 눈과 코, 툭 튀어나온 입이 우스꽝스럽다. 어딘가 심통이 나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물고기 인간은 정자에 누워 있거나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기고 있기도 한다. 전통회화인 〈어락도(漁樂圖)〉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작가만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서울대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김민주 작가는 한지에 먹과 분채 등 전통 재료로 그림을 그린다. 〈어락도〉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등 전통적인 화제(畵題)를 사용할 때도 많다. 하지만 옛 그림의 틀에 현대인의 심상(心狀)을 담아 새롭고 발랄하게 해석해낸다. 어부와 나무꾼이 자연을 벗하며 사는 즐거움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을 담은 옛 그림인 어초문답도. 작가는 〈어초문답도〉를 나체의 여인이 늘어뜨린 머리가 나무처럼 자라는 장면으로 재해석하면서 생각이 나무처럼 자라나기를 염원한다. 인간과 나무의 물아일체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생각이 막힐 때 머리를 감는 습관이 있어요. 머리를 내려뜨리면서 생각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죠. ‘무엇을 그려야 하나?’ 끙끙 앓다가 그냥 그 마음을 그림으로 표출했습니다.”
<어초문답〉이란 제목의 또 다른 그림에서는 커다란 그물을 움켜쥐고 있는 어부의 손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물의 아랫부분에는 구멍이 나 있다. 잔뜩 움켜잡으려고 해봤자 소용없다는 메시지다.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을 담은 것 같기도 하고, 현대인의 허탈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 그림이다. 작가는 아무리 애를 써도 길이 보이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의 막막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예술은 특히 다른 사람의 뒷받침 없이 혼자 힘으로 해나가기 어렵습니다. 작업실 월세를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막상 작업할 시간을 내기 어려운 형편이죠. 욕심을 낸다 한들 모두 이룰 수는 없고 결국 내려놓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 가서 분통 터트리는 성격이 아니어서 저 혼자 아쉬움을 달래면서 체념하곤 했는데, 최근 들어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저 역시 ‘이제 그만 그림을 포기하고 취직 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고민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전시나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 그림 그릴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주어져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그게 무척 감사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으니 불안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는 난지창작미술스튜디오, 고양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선정되면서 작업실을 해결하고, 서울문화재단,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등이 선정하는 작가로 뽑혀 기금을 지원받고, 다섯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 광주시립미술관의 하정웅 청년작가상을 수상했고, 뉴욕, 파리, 런던, 베이징, 상하이, 모스크바, 홍콩, 부다페스트 등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린 전시에도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과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금은 금호미술관에서 2월 12일까지 열리는 전시회 〈무진기행〉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동양화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해 현대화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30대 젊은 작가로서는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듯했지만 사실은 하루하루 분투해야 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2017년 개인전 계획을 묻자 ‘어디에서 지원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계획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꾸는 청춘들에게 다가온 마법 같은 시간을 그리는 영화 〈라라랜드〉가 떠올랐다. 그의 그림 역시 현실과 환상을 접목시킨다. 2011년 작품 〈별일 없이 산다〉에서 작가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을 현실 한가운데로 불러들였다. 3년간 조교로 일했던 학교 건물을 폭포와 연못, 나무 등 자연의 요소로 뒤덮은 그림이다.
“조교로 일하는 동안에는 저녁에 퇴근한 후에야 붓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연에 파묻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훌훌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죠.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머물고 싶은 공간에 있지 못하는 마음을 그림으로 풀어놓았습니다.”
현실에 붙잡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작가 혼자만일까?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과 마음속으로 꿈꾸는 공간을 그림 속에서 중첩시켰다. 〈휴가〉라는 제목의 작품에서는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다세대주택에 자연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 집에서 쉬면서 자연을 떠올린다는 의미에서 쉴 휴(休)와 집 가(家)를 조합해 이 그림에 ‘휴가(休家)’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연을 묘사한 그림을 감상하면서 누운 채 유람한다는 의미인 와유산수화(臥遊山水畵)의 정신을 잇는 작품이다. 〈배를 저어가자〉에서는 나무와 물, 돌 등 자연을 실은 배가 등장하고, 〈숲을 그린 까닭〉에서는 여러 색깔의 나무들로 가득 찬 숲으로 들어서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여행용 트렁크를 옆에 내려놓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채 얼굴을 들어 올려 숲을 조망하고 있는 여성. 그가 이제 새로운 여행지, 사색의 공간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은 팍팍한 삶의 탈출구이자 휴식처
“제가 그리는 나무나 물고기의 구체적인 수종(樹種)이나 어종(魚種)을 밝힐 수가 없어요. 물고기와 나무를 보편적인 이미지로 그리니까요. 종류를 파악할 수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무에 달린 열매를 무릉도원의 복숭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선악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생각의 열매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작가는 ‘누구나 꿈꾸는 자연 속의 휴식처,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 역시 그러지 못하지만 삶의 여유와 유머를 갖고 싶거든요. 제 그림 속에 해학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사실 제 그림의 밑바탕에는 허무함이 깔려 있어요. 실제로는 없는 공간, 그래서 갈 수 없는 공간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체인 데다 삿갓이나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옷을 입고 있거나 얼굴이 드러나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늙었는지 젊었는지 어느 시대 어느 계층의 사람인지가 드러나잖아요? 보는 사람마다 그림 속 인물에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그런 특징들을 일부러 없앴습니다.”
그의 숲 그림에서는 사다리에 올라가 열매를 따거나 엉덩이를 내놓은 채 누워 있거나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인물들을 숨은그림찾기처럼 찾아낼 수 있다. 누가 방금까지 타다 내린 듯 흔들리고 있는 그네와 의자도 찾을 수 있다. 보는 이를 그림 속 가상 공간으로 이끄는 장치다. 그림의 부드러운 색감이나 자그마한 인물들을 볼 때 작가가 여리고 부드러운 심성에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닐까 짐작된다.
“세필로 수없이 선을 그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생각이 맑아집니다. 억지로 꾸미는 게 아니라 제 마음 그대로를 드러내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편안해지죠. 그림은 제게 팍팍한 삶의 탈출구이자 휴식처입니다. 보는 분들도 그렇게 느끼셨으면 해요.”
현실을 이기는 힘은 결국 꿈꿀 수 있는 자유와 용기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