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이질화 하는 사유의 방식 -차승주 (아르코미술관)
언어로 사유하지 않고 이미지로 사유하는 작가에게 사유의 막힘은 곧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의 실종이다. 따라서 그리기 행위 자체는 그에게 사유를 지속하기 위한 수행의 일종으로 이는 종종 고통을 수반한다. 마치 화폭에 한 땀 한 땀 수놓듯 새겨진 세밀화처럼, 빼곡히 들어찬 나뭇가지, 조밀하게 연결된 풍성한 나뭇잎들은 그 수행의 방식을 이미지로 치환한 인내의 결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선별하는 사유의 언어는 그 조합과정에서 유희와 놀이가 되고, 이로 인해 확장하는 의미의 전환, 의미의 확장 방식을 사유를 시각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든다. 즉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로워진 그의 사유의 언어는 이상적인 풍경과 만나 현실계에 몸담은 그에게 대리할 수 있는 공간을 무한히 열어준다. 여기에서 그가 선택한 이상적 풍경은 산수화가 펼쳐지던 과거의 시공간과 연결된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에게 동양화가 지닌 매력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보다 새롭고 가능성이 풍부한 세계이다. 소위 동양화의 전통적 재료인 한지, 장지, 먹, 분채 등을 활용하여 전통 동양화에 등장하는 소재를 다루는 회화를 쉽게 접할 수 없는 요즘 미술의 풍토에서 그에게 동양화가 지닌 재료적, 화재畫材적 요소는 오히려 더욱 신선한 것이다. 그래서 장지에 수묵 베이스로 채색을 하고 다양한 색채를 풍성하게 낼 수 없는 분채의 한계를 수용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그의 작업을 특색 있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적 측면을 비롯하여, 화폭에 담기는 개별 이미지들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의 힘은 동양화의 담백함과 정적인 정서 외에도 그의 작업을 특별하게 하는 여러 근거로 작용한다.
그의 작품명에는 사유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유의 숲’, ‘사유 산수’, ‘사유의 섬’, ‘사유의 색’, 그에게 사유는 공간에 머물기도 하고 색을 지니기도 하고 고립되기도 하고 존재하는 사물과 생명체와 이야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명은 사유하기에서 오는 그의 심리상태, 나아가 화폭에 담긴 지시대상에 대한 직접적 언표이다. 그리고 이는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공감 영역을 비교적 빠르게 확장시킨다. 여기에서 ‘너무 바빠 망각하고 있던 어떤 즐거움을 잠시나마 찾아볼 수 있는 쉼과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고자 한다.’는 작가의 바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사유하기’의 형색이 나타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작품이 이끄는 시간적 거리, 작품 안에서 의미들이 발생하는 방식, 작품이 실제로 배치되는 물리적 공간과의 연결성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우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의 시계視界를 벗어날 수 있는 두 요소는 아마도 시간적 거리를 둔 전통 요소와 물리적 거리를 지닌 자연의 요소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조합이 작품의 주요 심상을 이끄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서정적이고 고요한 자연의 에너지로 충만하고, 현란한 이미지세계가 박탈한 전통적 여백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의 그림은 적어도 인간 군집이나 인간 중심적 시각 체계가 이끄는 자연의 인위적 배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대한 자연의 경이와 숭고함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 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는 전통 산수화의 화면구성과 소재를 재현하고 답습하여 동양화와 현대미술의 심리적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방점은 마치 숨은 그림처럼 배치되어 재현의 시공간에 균열을 가하는 개별 이미지들의 의미생성 방식에 있다. 그리고 이는 작가에게 ‘전통’이라는 것이 어쩌면 현실을 넘어선 ‘환상’의 영역일수도 있기에 가능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특정 동양화를 참조대상으로 하지 않았던 그에게 전통 동양화는 그것이 지닌 ‘담백한’ 인상과 재료적 특이성을 지닌,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인 것이다. 즉 작가는 전통적인 요소를 사용하지만 옛 그림의 형식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로서의 본인의 심상을 연결하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통의 시간을 경유한 본인의 현재를 스스로 이질화하는 방식을 터득한다. 여기에서 그의 사유하기는 전통 산수화가 재현한 자연의 풍경이 현실의 사물이나 생명체와 중첩되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틈 안에서 유희와 해학과 놀이가 된다. 이를테면 현대식 건물에 산수요소들이 들어차있고, 개인적 사유의 공간인 테이블은 산수요소와 공존하지만 그 일상적 형태 자체로 보편성을 지닌다. 한편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대표적으로 ‘작은 테이블’, ‘숲에 정박한 나룻배’, ‘얼굴을 알 수 없는 뒷모습의 나신(裸身)’, ‘반인반어(伴人半漁)’, ‘구멍 난 그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거대한 자연의 이미지를 매개한 이상적 현실 안에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아주 작은 일부이거나, 정적인 자연의 풍경에 갑자기 끼어든 교란이다. 이를테면 강위에 한가로이 떠돌아야 할 나룻배가 숲에 정박하거나 강물에 반쯤 잠긴 채 일부만 드러나고, 반인반어는 말 그대로 형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구멍 난 그물은 내부가 가득 차 있지만 곧 다가올 소멸의 시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또한 섬처럼 표현된 산수화는 고립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물이 흐르는 길을 통해 ‘길’ 혹은 방향을 찾으려하거나, 배가 산으로 가는 형상을 통해 생각의 어긋남을 표현하면서 언어의 다의성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이미지가 지닌 충만함 이면에 결여와 이탈을 은유하는 이미지를 덧붙여 그의 사유의 언어와 사유하기의 상태가 공존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사유언어는 전통적 소재 안에서 보다 의미의 확장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의 자유로운 유희는 전통 산수화에 등장하는 작품명과 형식(‘어초문답漁樵問答’, ‘산수유람’, ‘책가도’ 등)을 차용하면서 구현되기도 한다. <어초문답>의 경우, 어부랑 나무꾼이 대화하던 전통 산수화의 주요 소재를 가져와 이를 물고기가 된 어부와 나무가 된 나무꾼을 비유해서 표현한다. 그리고 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문방구, 골동품 등의 기물을 그린 전통 회화의 책가도는 김민주의 작품에서 다양한 (사유의) 방들이 집결되어있는 <사유산수>로 탄생한다. 그 안에는 기존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사유의 방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한 폭의 거대한 책장이 있다. 방안의 각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독립적인 공간을 구축하기도 한다. 마치 몇 년 동안의 그림을 모두 정리해서 한 화면에 담아낸 자신의 사유의 포트폴리오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흩어진 단상과 그림을 모두 모아 한 번의 정리가 필요했던 시점에 또 한 번 ‘책가도’라는 전통적 소재 안에서 그 구현의 방식을 찾았다.
이렇듯 전통과 현대, 고통과 유희, 환상과 실재, 나와 타자 등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소들은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이질적 긴장감을 최소화하며 공존의 타협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반인반어의 등장도 자신을 구성하는 타자의 일부가 접목된 모습이다. 근본적으로 경계성을 지닌 그림을 사유의 언어로 선택한 그에게 경계를 이해하고 독창적인 공존의 방식을 터득하는 일은 그림의 내적 평온함에 기여하고 나아가 그림이 배치되는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덜어 작품 형식의 다양성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즉 사유형색이 담긴 개별 작품을 사유의 공간이라고 여겼을 때 프레임 안에 온전히 펼쳐진 사유의 공간, 프레임의 요소들이 해체되고 분절되어 각각의 프레임과 공간으로 확장해서 여러 개의 다른 사유공간으로 펼쳐지는 작업, 하나의 캔버스 안에 아예 사유의 공간을 나눠 각각의 연결고리들을 이어기는 작업, 캔버스 혹은 프레임이라는 얼핏 닫혀있는 공간을 확장하려는 태도는 병풍, 화첩, 책가도, 족자형태 등 전통 산수화가 담기는 방식을 응용해 나타난다. 그리고 설치 방식의 과감성 뿐 아니라 작품의 구성 요소들, 이를테면 선과 색 자체를 분리하고 드로잉 소품을 시리즈로 채색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실험들이 쌓인 결과가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개인전에 나타난 형식적, 내용적 세세한 변화들을 형성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시도할 화법에는 새로운 색을 써보기, 다른 분야의 전문인과 협업해보기, 분명한 참조작품을 두고 전통회화를 재해석해보기 등 또 다른 과감한 행보가 엿보인다. 이 중 하나로 이번 신작에서는 총 여덟 폭의 대형 병풍에 조선시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참조한 산수화를 선보인다. 이는 그동안 참조 대상 없이 자유롭게 발산하는 상상력을 동양화의 재료를 빌어 화폭에 옮겼던 그가 외부의 자극과 규제안에서 스스로를 통제시키고자 하는 또 다른 수행의 방식이다. 이를 통해 오히려 극한으로 치닫는 엄격함 안에서 보다 심도 있는 훈련을 통해 본인의 작업이 지닌 원류源流를 찾아내고 일종의 제약 안에서 일시적 상상력이 주는 보다 강렬한 자유의 에너지를 작품에 반영하고자 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번 신작은 사계절을 주제로 한 전통 산수화의 요소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폭에 담기는 재해석의 미세한 장치들은 이번 신작을 통해 새롭게 얻은 그의 사유의 언어를 엿볼 수 있는 흥밋거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사유의 방은 조금씩 열리는 틈으로 서서히 외부와의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동양화 작가로서 내면의 사유의 얼굴과 마주하며 여러 번뇌와 유희의 언어를 시각화했던 그에게 경계에 머물기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그의 삶을 지탱하는 주요 자극일 것이다. 그래서 이를 받아들이고 점점 더 정제된 언어 안에서 오히려 내부욕망의 일부를 덜고 외부 가능성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듯한 작업의 흐름이 엿보인다. 이것이 그의 작업이 향후 일으킬 세세한 변화들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