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공간 - 채영 (공간시은)

회화는 채움의 과정이다. 점을 찍고,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붓의 반복된 움직임이 화면을 채운다. 채움은 비움이기도 하다. 회화에서는 바탕도, 여백도 비움의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무無의 공간은 아니다. 빈 바탕처럼 보이는 공간은 그저 형상이 없을 뿐이다. 형상이 없는 곳에는 바탕색의 물감이나 그림의 효과와 관리를 위한 다양한 재료들이 표면을 덮고 있다. 또한 종이나 캔버스 천 따위의 바탕의 재료 그 자체들이 화면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그 곳이 비어있다고 인식할 뿐이다. 회화란 본래 채워진 평면이다. 


작가 김민주는 자연의 형상들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사유의 숲>, <물장구>(2021)에서 화면은 숲 속 나무의 형상들로 빼곡하다. 섬세한 붓의 흔적들, 하나하나 새기듯 세필細筆로 그려 넣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바위의 굴곡과 물결, 그리고 채색된 잎과 열매까지 꾸준한 반복의 과정들이 하나의 형상을 만든다. <그림 그림>(2021)의 일부 연작들이나 대부분을 먹으로 그린 <사유의 숲>(2014) 처럼 형상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에는 동양 산수화 특유의 여백이 있는 회화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채워진 형상들이 화면 테두리의 여백까지 확장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확장된 형상들은 심상心像의 산수로서 재현된다. 이 형상들은 작가의 정서와 정신세계를 강조해 온 산수화의 영향 아래 있다. 풍경은 실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 이상향으로부터 온다. 회화는 그저 자연의 형상을 빌려온다. 그래서 회화와 관객 사이에서 시각적인, 미적인 교감이 생겨났을 때, 이는 우리가 실제의 자연을 보고 느꼈던 감각들과는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회화는 이상理想을 ‘담은’ 풍경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풍경의 ‘이상’이라는 허상을 꿈꾸는 대신, 작가는 ‘사유하는 공간’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회화 속 풍경을 통해 시도한다. 회화는 어떤 대상을 사유하는 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유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한다.

 

자연의 형상들로 빼곡한 풍경은 몇 가지 도식圖式들의 반복처럼 보인다. 그 외의 요소들은 풍경에서 생략된다. 김민주의 회화가 전통적인 산수화보다 현대회화처럼 보이는 것은 이처럼 몇 가지 자연의 형상들만을 조형요소로 삼아 화면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배열처럼 보이는 화면은 단조롭지 않다. 하나의 풍경이 수십, 수백 번 변화하는 모습을 갖는 자연의 특성이 이미 내부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채색된 듯 보이는 나무들은 그 안에서 색의 수많은 변화들을 드러낸다. 사이사이 바위와 폭포는 마치 동일한 패턴처럼 배치되어 있지만 그 하나하나의 색과 형태가 모두 다르다. 점과 선들의 집약체인 풍경은 작업 과정에 들어간 시간과 노동력을 드러내는 지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연이라는 거대하고 다변적인 존재를 회화로서 담아낸 결과이다.


현대회화의 순수한 조형성과 산수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 사이에서 회화는 작가의 이상인 ‘사유’의 공간을 만든다. 조선시대 산수화가 유교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재확인하는 장소였다면 오늘날 김민주의 산수화는 물질 과잉의 현대사회에서 현실을 비껴나 사유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사유가 일어나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회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내부이다. 다만 회화 속 자연은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한다.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곳이며, 우리가 회화 속에 들어가 풍경을 바라보게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유의 주체가 된다.


물론 우리의 신체는 회화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회화에 몰입할 때, 회화의 공간 안에서 회화의 표면을 본다. 숲 속에 지어진 정자에 누워 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을 회화 밖에서 보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 인물이 되는 것을 상상하거나 혹은 회화 속으로 들어가 인물을 볼 수도 있다. 발가벗고 물에 뛰어들거나 손을 뻗어 과일을 따고, 비어 있는 캔버스를 채울 회화 속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이를 회화 안에서 그리고 회화 밖에서도 볼 수 있다. 몰입은 김민주의 회화를 현실과 이상의 경계로 만든다. 이러한 몰입은 채워진 회화 속 비어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림 그림>처럼 주변부의 여백은 회화의 형상과 현실의 공간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여백은 형상을 생략함으로써 표현을 절제하고 대신 그 안에 상상력, 시정詩情과 여운을 남긴다. 밖으로 뻗어나갈 것만 같은 선과 색들을 회화의 틀 안에서 강조된다. 덕분에 우리의 시선은 회화의 깊은 곳을 찾아 형상에 머문다. 이때 형상 속 ‘틈’들이 우리를 화면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 틈들은 숲 속 세워진 빈 캔버스, 숲 속 연못, 비어있는 나룻배, 물에 뛰어든 반인반어半人半魚, 나무를 비집고 나온 손과 발에 있다. 불쑥 튀어 나온 신체의 일부는 나머지 신체가 숨어있는 틈을 암시한다. 자연의 형상들이 화면 밖까지 무한히 확장될 것만 같은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데 비해 회화는 계속해서 내부의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들이 바로 사유의 공간이다. 회화는 정신적이면서도 신체적인 반복의 행위로 만들어진다. 작가는 자신의 회화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반복의 형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비어있는 공간으로 들어가 가득 찬 풍경을 바라본다. 사유는 복잡한 생각들을 비우고, 대상에 대한 생각들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회화를 보기만 해도, 대자연의 풍경 앞에 서기만 해도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방에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아니며, 이른바 멍을 때리고 있는 순간이 사유인 것도 아니다. 사유를 위해선 현실의 감각을 유지한 채로 이상들과 마주하는 공간,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김민주의 회화 안에는 사유의 대상이 없다. 사유의 숲이 있다.